1711년,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서 무시당했던 사건을 알아보자.

1711년,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서 무시당했던 사건을 알아보자.1711년,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서 무시당했던 사건을 알아보자.

1711년 역대 최대 규모의 8대 통신사 (신묘 통신사행, 규모 500여 명)를 그린 ‘정덕도 조선통신사 행렬도’
통신사와 수행원을 호위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요.

그런데 사실 이 1711년 신묘 통신사는 큰 굴욕을 당한 통신사절이라고 해요.

당시 일본 막부의 외교 거물이자 최고 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 (1657 ~ 1725)가 1711년 파견된 통신사 정사 조태억(1675 ~ 1728) 일행과 붓글씨로 필담을 나눈 기록을 담은 <강관 필담>이라는 책이 있다고 해요.

대화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당시 양국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알아볼게요.

당시 조선에서는 소중화 주의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게 무엇인가 하면 “천하의 중심인 명이 오랑캐 청에게 망했으니, 우리 조선이 곧 중화이다.”라는 뜻이라고 해요.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야만족으로 생각하여 현실에서는 사대하는 태도를 보였으나 이념적으로는 이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고 해요.

1703년부터는 만동묘라 하여, 유생들이 이미 망한 명나라의 만력제와 숭정제를 기리며 엄청난 규모의 제사도 지내고 있었다고 해요.

일본의 데지마 섬.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덜란드와의 무역 및 교류가 이루어진 장소라고 해요.
에도시대 일본과 무역 관계에 있던 네덜란드를 위해 막부에서 설치한 무역 거주 구로,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은 축구장 2개를 합한 것보다 조금 더 넓은 면적이었다고 해요.

이곳에서 일본인들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 즉 200년 동안 난학이라 불리는 서양과학을 접했고 이후 메이지 유신까지 서양 문물의 쇄도에서 일본 내의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완충제 구실을 했다고 해요.

1709년 (조선통신사 파견 2년 전), 일본의 야쿠 섬에 한 서양인 선교사가 상륙했고, 곧바로 체포되었다고 해요.
데지마로 압송당한 이 서양인은 이탈리아인 선교사 ‘조반니 바티스타 시도티(Giovanni Battista Sidotti)’로 당대 일본에서 손꼽히는 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가 직접 취조를 담당했다고 해요.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미 자신이 직접 사놓은 세계 지도를 여러 벌 지니고 있을 정도로 서양에 대해 탐구심이 깊었는데 이 서양 선교사를 취조하며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다고 해요.

<통신사 대표 ‘조태억’과 일본의 학자 ‘아라이 하쿠세키’>

그렇게 2년이 지나 1711년, 통신사 일행을 접견한 아라이 하쿠세키는 이 자리에서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들을 떠보게 되요.

<프랑스 ‘니콜라스 드 페르’의 ‘세계 지도’ – 1700년 제작,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소장 중>

그는 조선 통신사들에게 ‘대서양, 이태리, 구라파(유럽), 이탈리아, 화란(네덜란드)’이 어디있는지 아느냐고 돌려 물어봤는데, 조선통신사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통신사 부사 임수간이 자존심이 상하기 싫었는지 이렇게 말 했다고 해요.

“대서양은 서역에 있는 나라 이름인데, 다른 이태리, 구라파, 화란은 어디 있는 나라 이름인가?”

그 대답을 들은 아라이 하쿠세키는 가만히 있다가
“조선에는 만국전도(세계지도)도 없는가?” 라고 비웃음을 흘렸다고 해요.

이것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내용이 아니라 실제 신묘 통신사행의 대담 중 기록된 일인데, 조선 통신사들은 이후 상당한 위화감을 느꼈고 주제를 돌리려 했다고 해요.

“조선은 청나라도 인정하는 예의지국이며, 일본에도 성리학이 흥하여 앞으로 일본도 중화의 예를 따를 조짐이 보인다.” 라고 말하는데

아라이는 “천하가 청나라 세상인데, 망한 명나라를 흉내내며 엉거주춤 할 필요가 있는가?”는 식으로 쏘아물었다고 해요.
이후에도 설전이 오가다가, 조선 통신사들이 아라이 하쿠세키를 꾸짖게되죠.

조선 통신사들은 “왜 죽은 명나라 황제들의 이름이 들어간 한자를 예의없이 말하면서 하늘이 노할 불경한 짓을 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고 해요.

이에 아라이는 “문자는 뜻을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문자 그 자체가 뭐가 중요하단 말이오?” 라고 되묻게 되죠.

이후 대화가 더 이어졌고, 통신사들은 주제를 돌려 중화의 예법을 가장 잘 따르는 것이 조선이라고 말하며 예의와 효에 대한 필담으로 넘어갔으며, 아라이 하쿠세키도 장단을 맞춰주며 더 이상 공격적인 태도를 내보이지는 않았다고 해요.

아라이 하쿠세키는 조선 통신사 접대 비용과 대우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일본의 쇼군에 대한 조선의 문서상 호칭도 ‘일본국대군 日本國大君’에서 ‘일본국왕 日本國王’으로 고치는데 성공했다고 해요.
이 때문에 조선 통신사 대표 조태억은, 조선에 돌아와서 한양에 입성하지도 못하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지방으로 쫒겨났다가 훗날 복귀해야 했다고 해요.

<서양기담 – 아라이 하쿠세키, 1715년>

아라이 하쿠세키는 4년 후인 1715년에, ‘서양기담’ 이라는 위의 책을 발표하게 되요.

각 권의 목차를 보면,
지구의 전경과 모양, 마젤란의 세계일주, 유럽의 제국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동진,
강국 네덜란드의 역사와 해전, 유럽에서 군주를 정하는 방법, 유럽의 언어, 아프리카, 인도,
북아메리카 및 남아메리카의 위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경위와 연표, 마테오 리치, 일본과 중국의 차이 등 ···

서양에 대해 평생 조사한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무려 50개 항목이 망라되어 있다고 해요.

‘채람이언’ 이라는 책도 발표하고 사망하였는데, 채람이언은 일본 최초의 세계 지리서로 평가되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남북 아메리카 등의 지리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해요.

이렇듯 중국 문화권 외 서양과 세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에게, 조선 통신사들이 변변치 못한 대응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요??

출처: 1711년, 일본에서 조선 통신사가 무시당했던 사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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