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아르헨티나 로드리가소(Rodrigazo)에 대해서 알아보자.

1975년, 아르헨티나에서는 거대한 지옥의 문이 열리게되요.
오늘은 그 지옥의 문…바로 헬게이트라고 불리우는 로드리가소(Rodrigazo)에대해서 알아보아요.

1. 망국병: 페론의 그림자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여성 대통령인 이사벨 페론 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이사벨 페론은 포퓰리즘의 원조로 불리우는 후안 페론의 세번째 부인인데요.(두번째 부인이 ‘에바타’로 알려진 에바 페론)

아르헨티나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이사벨은 여기저기 떠돌며 공연을 하던 댄서였다고 해요.
나이은 남편인 후안 페론보다 무려 35세나 어렸죠.
이사벨은 1931년생으로 후안을 만날 당시에는 경우 29세였다고 해요.
후안 페론은 에비타를 앞세웠던 포퓰리즘 통치 도중 1955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서 쫓겨난 후 1960년 이사벨을 만날 당시 파나마에서 부활을 다짐하던 망명객이었다고해요.
이렇듯 막대한 재산을 해외에 빼돌렸던 후안은 노조와 결탁했고 정계에 북귀 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요.

후안은 젊고 아름다운 이사벨에게 빠져들었고 청혼까지 하게되죠.
능구렁이 같은 정치인 후안에게는 젊은 여성에 대한 옥구 이외에 또 하나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고해요.
후안은 대통령 시절 젊은 백인 여성 에비타를 내세움으로서 얼마나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는지 기억하고 있어어요.
정치에 젊은 여성을 내세우는 감성팔이가 필요함을 잘 알고 있던 후안은 에비타의 후임자가 필요했던거죠.
이사벨은 에비타와 외모가 비슷했고, 아르헨티나 국민이 가진 백인 여성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금발, 파란눈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죠.

후안과 결혼한 이사벨은 이미 건강이 나쁘던 후안의 측근으로 활발한 대외 활동에 참여하게 되요.
그리고 후안의 지지자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죠.
이사벨은 정치나 경제에 대한 안목은 없었으나 누가 남편의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하는 후각만큼은 뛰어났다고 해요.

이미 틀딱이 된 후안 페론과 댄서 출신의 영부인 겸 부통령 이사벨 페론

▲이미 틀딱이 된 후안 페론과 댄서 출신의 영부인 겸 부통령 이사벨 페론

이사벨은 1964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하던 중에 호세 로페스 레가(Jose Lopez Rega) 라는 인물을 만나게 되요.
레가는 아르헨티나의 라스푸틴이라 불릴 정도로 수수께끼에 쌓인 인물이었어요.
그는 겉으로는 성실한 경찰관이었으나 실제 정체는 ‘용한 점쟁이’ 였다고 해요.
이사벨은 레가의 신통력에 끌렸었고 레가가 하는 말이면 무엇이든지 듣게 되었다고 해요.

후안 페론은 자신을 몰아낸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면 누구든 끌어들였다고 해요.
후안 페론은 좌파나 우파가 아닌 철저하게 자기 권력만을 챙기던 포퓰리스트였죠.
그래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도 페론에게 붙었고,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반공주의자들도 페론에게 붙었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페로니스타(페론 추종자들) 내부에서 좌익과 우익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죠.

레가는 냉혹한 반공주의자였기에 이사벨의 신임을 얻어서 서서히 공산주의 파벌을 몰아내기 시작하게 되요.
결과적으로 후안 페론에게 매우 유리한 결정이 되었죠.
아르헨티나의 자본가들은 페론 지지로 돌아섰고 CIA도 페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죠.
자연스럽게 페로니스타 반공주의 세력의 간판과도 같았던 이사벨의 지위 또한 올라가게되요.
이 모든게 레가의 조언 덕분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사멜은 더욱 레가를 신임하게 되지만,
이 때 페로니스타 진영에서 밀려난 공산주의자들은 게릴라를 조직하여 아르헨티나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되요.

그리고 후안 페론은 1973년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다시 권력을 잡게되었죠.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던 이사벨은 늙은 남편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서 부통령이 되었어요.
하지만 1895년생인 후안의 건강은 몹시 나빠지게 되면서 대통령으로서 업무를 제대로 할 수 없게되었다고 해요.
자연스럽게 여부인 겸 부통령인 이사벨이 대통령 대행으로서 활동하는 일이 늘어나게 되었죠.
결국 1974년 후안 페론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이제 겨우 40 초반의 이사벨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 것이에요.

그런데 이사벨은 경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요.
호세 로페스 레가 조차도 경제에 대해서는 잘 몰랏다고 해요.
하지만 이사벨은 남편이 어떻게 권력을 지켰는지, 누구를 어떻게 매수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고 해요.
그리고 남편을 지지하던 페로니스타 출신의 경제학차를 기용하여 그들의 조언을 듣게되죠.

2. 1975년: 헬게이트가 열리다

이사벨 페론은 두 명의 남성에게 의존하고 있었다고 해요.
하나는 복지부 장관 자리에 앉아 뒷구명으로는 비밀경찰을 운영하며 반대파를 암살하던 호세 로페스 레가 였고,
다른 하나는 경제부 장관 셀레스티노 로드리고였어요.

로드리고는 후안 페론에 의해서 중용되었던 사회주의 경제학자였어요.
소득주도 경제 성장 모델을 내세우던 인물로 후안 페론의 포퓰리즘에 중요한 사상적 기초를 제시한 인물이기도 했죠.
더군다나 로드리고는 레가가 추천한 인물이기도 했어요.
이사벨은 로드리고가 시키는대로 경제정책을 충실히 따르게 되죠.

▲ 연설하는 이사벨 페론과 호세 로페스 레가

하지만 당시 아르헨티나는 이림 과도한 정부 지출의 악영향이 드러나고 있었어요.
아무리 월급을 올려주어도 물가는 그 이상으로 치솟는데다가 아르헨티나의 외환 보유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부 장관 로드리고는 정부 지출을 줄이는게 아니라 오히려 ‘소득주도 경제성장’을 더욱 밀어 붙이게 되죠.
로드리가소(Rodrigazo)는 바로 1975년 5월 로드리고가 실시한 소득주도 경제 성장 정책들을 일컫는 말이에요.
로드리가소의 주요 내용은…

  1. 노동자들의 소득을 더 높임
  2. 페소하를 평가 절하
  3. 연로에 매기는 세금과 대중 교통비를 올림

위 세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는데
소득을 계속 올리는 대신 외화를 확보하기 위해 수출에 유리한 화폐 평가 절하를 감행하면서
발생하는 국가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세금과 대중 교통비를 인상 한 것이에요.

그 결과…
아르헨티나에서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되죠.
불과 한달만에 35% 물가상승률을 기록하게되요.
그리고 재정적으로 취약하던 기업들은 불과 한달만에 줄도산이 일어나게되죠.
특히 대중 교통비 등의 체감경기까지 갑자기 나빠지자 엄청난 경제난의 위험을 감지한 아르헨티나인들은 페론 정부에 맞서 반대 시위를 벌이게 되요.
페로니스타 포퓰리즘 정권에서는 최초의 반정부 시위였죠.

그 부작용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사벨 페론은 당황하여 레가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로드리가소를 7월에 폐지하게 되요.

정부 내에서도 비판이 너무나 거샜기 때문에 이사벨은 서둘러 경제부 장관 자리에서 로드리고를 해임하고,
로드리가소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레가도 복지부 장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게 하죠.
그리고 레가를 스페인 대사에 임명하여 해외로 보냈는데요. 사실상 비판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죠.

그러나 레가가 스페인으로 떠난다는 것은 사실상 이사벨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사라진다는 의미와 같았죠.
권력에 도전하는 시도가 발생할 것을 몹시 우려했던 레가와 이사벨은 궁리 끝에 많은 지지를 얻던 합참의장 알베르토 누마 라플라네 장군을 해임하게 되죠.
그 후임으로는 카리스마 없는 똥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을 임명하게 되요.

▲ Jorge Rafael Videla

3. 1976년: 지옥의 시작

아르헨티나의 물가는 계속 상승하고 있었고, 상공업은 계속 하락하고 있었죠.
이러한 상황에서 포퓰리즘 꿈을 버리지 못한 국민들은 “월급을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올리면 되지 않느냐”는 주장을 펴며 시위를 하게 되었었어요.
거듭되는 반정부 시위 속에서 이사벨 정권은 완전히 마비되고 있었죠.

한편 라플라네 장군의 옷을 벗김으로서 군부의 쿠데타 시도를 막았다고 생각하던 이사벨의 의도와 달리 신임 합참의장 똥별 비델라 장군이 진짜 야심가였어요.
그는 정치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야심을 숨길 줄도 아는 인물이었어요.
고려시대 정중부처럼 조심스러운 성경의 비델라는 해군의 에밀리오 마세라 제독, 공군의 올란도 아고스티 준장을 포섭하여 연합군사정부(훈타: junta)를 구성하게 되요.
(이는 CIA가 지원했다는 설도 있어요.)

그리고 훈타는 이사벨 페론 정권의 경제적 무능을 규탄하며 공산주의 게릴라에게 나라가 먹힐 것이라고 주정하며 1976년 3월 24일 쿠데타를 일으키게되요.
육해공 3군이 모두 가담한 훈타에 맞설 세력은 없었고 비델라는 간단히 권력을 탈취하게되죠.
그리고 비델라는 대통령 대행에 오르게 되면서 이사벨은 스페인으로 망명하게 되요.
비델라의 쿠데타 이후 아르헨티나는 표면적으로는 훈타가 통합권력기구이고 대통령은 공식으로 없었어요.

▲ 아르헨티나 훈타: 왼쪽부터 마세라 제독, 비델라 장군, 아고스티 준장

훈타는 이사벨 페론에게 실망한 민심을 거둔다는 명목으로 후안 페론이 했던 것 같이 포퓰리즘을 답습하게되요.
그래서 첼레와 달리 아르헨티나는 군사정권 때 경제발전을 거이 하지 못했다고 해요.
또한 페로니스타 정부와 대립하던 좌익 게릴라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훈타는 Dirty War로 알려진 대테러진압 작전에 나서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거나 살해했다고 해요.
경제난에 Dirty War까지 겹쳐진 아르헨티나는 진정한 지옥을 맛 보게 되죠.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 아르헨티나의 훈타(연합군사정부)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자국팀을 우승시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해요.
심판 매수, 스케쥴 조작, 금지약물, 협박 등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했다고 해요.
그래서 일까요?? 1978년 월드컵은 개최국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하게 되죠.

하지만 축구시합에서의 짧은 기쁨으로 아르헨티나의 지옥을 모두 덮을 수는 없었죠.
후안 페론, 이사벨 페론, 그리고 훈타(연합군사정부)를 거치면서 아르헨티나의 체질로 굳어버린 포률리즘 정치는 아직도 아르헨티나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에요.

4. 후일담

호세 로페스 레가는 철저히 사람들을 피해서 살았다고 해요.
스페인에서 파파라치들에게 모습을 들키게 되자 스위스로 도망을 쳤죠.
그리고 1986년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도망을 쳤는데 그 당시에는 레가가 아르헨티나에서 저지른 암살 등의 혐의로 이미 기소되어 있던 상태였다고 해요.
그래서 레가는 미국에서 체포되어 아르헨티나로 송환 되었죠.
그리고 재판 도중에 당뇨병이 악화되어 1989년 사망하게 되죠.

이사벨 페론은 현재까지도 살아있다고 해요.
레가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재임 시절 저지른 범죄로 2007년 체포되었으나 이미 고령이고 허리 골절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재판을 사면해주었다고 해요.

1976년 권력을 잡은 훈타(연합군사정부)는 비델라의 뒤를 이어 로베르토 비올라 장군, 칼로스 라코스테 제독, 레오폴도 갈티에리 장군으로 계속 권력을 세습하면서 철권통치를 유지했어요.
그러나 갈티에리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하면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되죠.
영국군은 화친의 조건으로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의 사퇴 및 민주 선거를 요구하면서…
결국 훈타는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죠.
훈타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어 그간 저질렀던 인권유린 범죄에 대한 재판을 받았다고 해요.

▲ 유죄를 선고받은 비델라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를 회복 시킨 인물은 사실상 마가렛 대처 총리에요.

아르헨티나는 1986년 월드컵에서 우승을 달성하게 되죠.
또한 소득주도 경제성장의 전도사 셀레스티노 로드리고는 1987년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이렇듯 아르헨티나의 사례로 보았을 때 소득주도 성장은 모두가 망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지만,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는 소득주도 성장을 가지고 와서 대한민국에 이식하려고 했죠.
현재도 이러한 기조로 국민들을 속이려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사실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듯 하네요.

출처: 1975년 아르헨티나: Rodrigazo에 대해 ARAB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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